박완서님의 노란집을 신간으로 구입하면서 약간의 염려가 있었다. 혹자의 말처럼 고인이된 작가의 후손이 발간하는 책 대부분이 정제된 언어로 심혈을 기울여 써내려갔던 글이기 보다는 자녀된 자의 그리움의 마음으로 모아진 것들일 수 있다는 선입관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감각이 굳어지거나 감수성이 진부해지지 않으려고, 그러니까 노화하지 않으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작가라고 감히 자부한다…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박완서님은 역시 달랐다. 특히 노란집이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인생의 U턴을 지나 노년기를 바라보며 준비해야 하는 내게, 자신이 겪고 깊이 느낀것 밖에는 잘 쓰지 못한다고 말하는 작가의 노년의 체험을 통해 우러나오는 깊은 얘기들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쁜 오솔길을 걷듯이 추억을 아껴가며 영감님을 등을 정성스럽게 씻기는 마나님의 모습이나 아무도 대작할 이 없이 쓸쓸하게 막걸리를 들이키게 될 모습이 싫어 영감님보다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라는 마나님의 마음, 마나님의 쭈르렁바가지처럼 편안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뜰 수 있기를 바라며 마나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영감님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어떤 젊은 연인들의 모습 못지 않은 사랑스러움이 넘친다. 그들에게도 토라짐의 순간이 있음을, 마나님만의 손길을 고집하는 영감님을 사치스럽다고 표현하는 것과 오랫동안 해로한 부부이지만 정떨어지게 하기도 한 일을 자신은 당하고 싶지 않아 지키고자 하는 마나님의 마지막 자존심을 여자의 끼로, 허영으로 표현하는 글을 읽으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경쾌함과 진지함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를 마음 깊이 아끼고 존경한다는 따님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된다.

자다 깨어 일어나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눈에만 잘 안 보인다뿐 엄연히 존재하는 아름답고도 조화로운 살아 있는 세상의 감동스러움에 가슴이 울렁거렸다는 글과, 자신의 시선으로 잰 하늘의 높이보다 몇 배나 깊은 하늘이 기껏해야 높이 두 자밖에 안 되는 독속에 잠겨 있음을 관찰하고 감탄해하는 모습은 그의 깊은 감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누더기나무라 이름붙였던 나무의 ‘이름’을 알고부터 그 나무의 실체 모습이 달라 보였다는 글,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외딴 산길을 홀로 가며 느끼는 고독이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는 표현, 상현달과 상사초꽃의 황홀한 교감을 바라보며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을 발견하며,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황홀한 순간과의 만남으로 행복해하는 민감함이 부럽기까지 하다.  별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는 것에서 느껴지는 신비에서 하루를 사는 힘을 얻고 그것들과 은밀하게 교감하는 나날을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살아있는 생은 그자체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의 넉넉함 때문에 칠십 평생보다 더 길게 느껴졌고 또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주었다는 유년의 추억 속에서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종일 밖에서 놀다가 들어간 따뜻한 아랫목과 김나는 밥상의 추억, 신사임당 못지 않은 예술가였던 할머니의 보배덩어리 시절, 깡충깡충 달려와 할아버지의 짐 속에서 제일 먼저 찾아내어 밤새도록 끼고 잤던 추석빔 선물, 어릴적 누구나 한번쯤 저질러 보았던 도벽, 시험을 앞두고도 밤새도록 빌려온 책읽기에 바빴던 시절등의 추억을 읽으며 내 어린시절에도 이랬었지 하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너무 비싸 보여서 눈에 띄는 것도 싫고, 너무 초라하거나 유행에 뒤져서 튀는 것도 싫다는 그의 옷에 대한 신조에서처럼 그의 글은 이웃집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옛적 익히 알고 들어왔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지만 들을 때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이런 작가가 들려주는 우리들의 얘기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다행히 이 책에서는 웃음 지으며 창밖을 내다보거나 서재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그림, 큰언니처럼 믿음직스러운 연변 조선족 여인의 등에서 착한 아기처럼 벙글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 등 저절로 미소짓게 하는 그림들이 있어 우리 곁을 떠난 작가에 대한 그리움을 덜어주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작가가 달의 절정은 만월이 아니라 상현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는 상사초와의 만남을 표현하는 그림에 보름달이 걸려있는 것이다. 청순하고도 요염한 달빛을 상현달로 표현하기에는 무리였을까.....